
얼마 전 지그재그의 이미준 PO님 강연을 접하고 나서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어요.
15년째 이커머스 서비스를 만들어온 분인데, 처음에 'PM·PO'라는 직업을 들었을 때 솔직히 저도 "그게 뭐 하는 직업이에요?"라고 물어봤던 기억이 나거든요. 그런데 강연을 다 듣고 나니, 왜 이 직업이 중요한지, 그리고 AI 시대에도 여전히 필요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가 정말 명확하게 와닿더라고요.
참고로 이미준 PO님이 일하는 지그재그는 요즘 업계에서도 화제인데요. 카카오스타일 내부 데이터에 따르면, 2024년 한 해 신규 구매자 수가 전년 대비 40% 급증했고, 월간 활성 사용자 수(MAU)도 연초 400~500만 명 수준에서 연말에는 700만 명에 가까워졌다고 해요. 거래액은 지그재그와 포스티 합산 기준으로 2조 원에 육박하고, 매출은 창립 이래 처음으로 2,000억 원을 돌파하며 5년 만에 영업이익 흑자 전환에 성공했습니다. 단순히 숫자가 좋은 게 아니라, 패션 산업 전반이 침체된 고물가 상황 속에서 이뤄낸 성과라 더욱 인상적이에요.
그 중심에 있는 이미준 PO님이 15년 동안 쌓아온 이야기, 오늘 제 방식으로 풀어볼게요.
"커피 타는 것만 빼고 다 한다" — PM·PO란 어떤 직업인가요?
이미준 PO님이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선배들이 해준 말이 바로 이거였대요. "커피 타는 것만 빼고 다 한다." 웃프면서도 정말 정확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IT 서비스를 만들려면 기술적으로는 개발자와 디자이너만 있어도 되긴 하죠. 하지만 현실은 훨씬 복잡합니다. 수많은 이해관계자, 언제나 부족한 리소스, 끊임없이 터지는 문제들. 이 모든 걸 조율하고, 팀이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환경을 설계하는 역할이 바로 PM·PO예요.
이미준 PO님은 15년 동안 이커머스를 만들었지만, 통째로 다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 서비스는 거의 없다고 솔직하게 말씀하셨어요. 주문 시스템만, 취소·반품 같은 클레임 처리만, 상품 등록 페이지만 맡기도 했다고요. 그런데도 15년째 살아남아 계신 이유가 있죠. 바로 그분이 그토록 강조하는 '협업'이라는 역량 덕분입니다.
입사 2년 차, 화를 내고 후회한 이야기
강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초년차 시절의 실수담이었어요.
이미준 PO님은 입사 2년 차 때 상품 등록 시스템을 기획했는데, 보이지 않는 정책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프로젝트였다고 해요. 본인은 엄청 열심히 기획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테스트를 해보니 오류 투성이였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어떻게 하셨을까요? 본인보다 나이 훨씬 많은 개발자 두 분께 엄청 화를 내셨대요. "어떻게 정책도 모르면서 개발을 하실 수 있어요? 왜 제 기획안을 제대로 안 보셨어요?" 그 분노를 숨기지도 않고 팀장님한테까지 가서 일렀다고 하시더라구요. 드라마 속 기획자들처럼, 완벽주의를 추구하고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게 맞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던 거죠.
프로젝트는 결국 성공적으로 오픈했습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었어요. 또다시 그 개발자분들과 프로젝트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됐는데, 서로 얼굴도 보기 싫은 상태가 돼버린 거예요. 회의실 분위기는 최악이었고, "아 그래요"라는 단답형 대답만 돌아올 뿐 제대로 된 협업 자체가 불가능해졌죠.
그때 비로소 깨달으셨다고 해요. "아, 나는 하루 이틀 일할 게 아니라 10년, 20년 이 업계에서 일해야 하는데, 관계를 이렇게 만들면 안 되겠구나." 프로젝트 하나를 잘 오픈하는 것만이 다가 아니라,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지속하고 모두의 이해도를 높이는 게 진짜 기획자의 역할이라는 걸요.
진짜 잘못한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지금 돌이켜보면 개발자분들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도 기획자의 잘못이었다는 말씀이 정말 와닿았어요.
더 좋은 방법이 있는지 개발 입장을 먼저 물어볼 수도 있었고, 처음부터 일방적으로 요구사항만 던질 게 아니라 같이 기획을 만들어 나갔다면 이해도가 훨씬 높아졌을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결국 일을 못 한 사람은, 제대로 이해시키지 못하고 혼자만의 세계에서 기획했던 본인이었다는 거죠.
이 부분에서 정말 많은 직장인분들이 공감하실 것 같아요. 우리는 종종 "내가 다 설명했는데 저 사람이 이해를 못 하네"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진짜 문제는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하지 못한 우리 자신일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미준 PO님이 얻은 교훈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상대방을 존중할 것. 둘째, 기획자가 일을 잘한다는 기준은 '계속 같이 일하기 좋은 사람'이 되는 것.
법무팀은 방해자가 아니라 리스크 발견자다
이 부분도 정말 인상 깊었어요.
IT 서비스를 만들다 보면 전자상거래법, 개인정보보호법, 광고법, 전자금융거래법 등 다양한 법률이 연관되어서 법무팀과 협업할 일이 자주 생긴다고 해요. 그런데 초년차 시절엔 법무팀이 마치 방해자처럼 느껴졌다고 하시더라고요.
예를 들어 이벤트를 기획할 때, 기획자 입장에선 당연히 신청 완료율을 높이고 싶잖아요. 그래서 개인정보 동의 체크박스를 기본 체크 상태로 두고 싶은데, 법무팀에 가면 "리스크가 있어서 안 됩니다"라는 답변만 돌아온다는 거예요. 처음엔 '대안도 없이 그냥 반대만 하는 건가?' 하는 생각에 화가 났다고 해요.
하지만 법무팀과 더 많이 일하면서 깨달은 게 있었대요. 법무팀의 역할은 리스크를 발견하는 것이지, 대안을 제시하는 게 아니었다는 거예요. 리스크를 인지했다면 그걸 어디까지 감당할 것인지, 그 안에서 어떤 대안을 만들어낼 것인지는 기획자의 몫이라는 거죠.
각자 다른 책임을 가진 협업자라는 걸 인정하고 나니, 협업이 훨씬 유연해지고 목표에도 더 빠르게 다가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건 법무팀뿐 아니라 모든 협업 관계에 그대로 적용되는 원칙이에요. 상대방의 역할과 책임을 이해하고 존중할 때, 비로소 진짜 협업이 시작된다는 거죠.
AI 코딩 시대, 오히려 존중의 기술이 더 중요해졌다
요즘은 '바이브 코딩', 즉 AI에게 자연어로 지시하면 바로 코드를 짜주는 시대잖아요. 기획자들도 직접 구현해서 개발자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됐는데, 여기서도 협업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정말 흥미로웠어요.
어떤 주니어 기획자분이 AI 코딩 툴로 아이디어를 구현한 다음, 공식 회의에서 개발자들에게 "이렇게 만들어 주세요"라고 보여줬는데 반응이 굉장히 싸늘했다고 해요. 왜였을까요? 개발자의 영역을 침범했기 때문이에요. 사전 언급도 없이, 마치 개발자가 해야 할 역할을 본인이 먼저 해버렸다는 식으로 발표한 거였죠.
이미준 PO님은 이렇게 조언하셨대요. "사적인 자리에서 먼저 보여드리고, '제 기획을 잘 이해하기 위해 이걸 만들어봤어요'라고 했다면 훨씬 분위기도 좋아지고 아이디어도 잘 전달됐을 거예요."
여기서 중요한 건 말의 기술이 아니라 존중의 기술이라는 거예요. 타이밍, 맥락, 존중 — 이 세 가지가 다 지켜져야 한다는 거죠. "이거 개발 쉬운 거 아니에요?" 같은 식으로 상대방의 전문성을 얕보지 않고, 오히려 제대로 인정하고 존중할 때 더 많은 전문성을 끌어낼 수 있다는 말씀이 정말 마음에 남았어요.
성장의 기준 — 협업할 수 있는 사람의 범위
이 부분은 정말 명언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미준 PO님은 본인의 성장을 직급이나 회사 규모, 프로젝트 성과로 측정하지 않는다고 해요. 대신 '협업할 수 있는 사람의 범위'가 넓어지는 것을 성장의 기준으로 삼고 계시더라고요.
IT 업계는 무엇이 성공할지 아무도 모르고, 실패가 굉장히 많은 곳이잖아요. 실패를 통해서만 학습이 이루어지는데, 성공한 프로젝트로만 성장을 측정하면 실패한 프로젝트는 다 의미 없는 게 돼버리잖아요. 그래서 한 번에 협업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는 걸 성장 지표로 삼으신 거예요.
초년차엔 개발자, 디자이너 딱 두 명과 작은 기능 단위만 기획했는데, 지금은 최근 프로젝트 채널에만 155명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라고요. MD, 법무팀, 개발자, 디자이너, CS팀 등 각자 다른 상황과 목표, 책임을 가진 150여 명과 함께 일하고 있는 거예요. 이미준 PO님이 하는 일은, 그 모든 분들에게 명확한 기준을 전달하고, 목표를 설명하고, 각자의 영역을 지켜드리는 일이라고 하셨어요. 그게 바로 진짜 경쟁력이라는 거죠.
AI에게도 협업하듯 말하면 결과가 달라진다
강연에서 가장 인상적인 메시지가 여기 있었어요.
AI 시대가 되면서 혼자 처리할 수 있는 일이 굉장히 많아졌지만, 협업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이미준 PO님도 요즘 업무에서 AI를 정말 많이 활용하신다고 해요. 과거에는 데이터 팀을 쫓아다니며 받아야 했던 자료를 이제 AI에게 부탁해서 정리하고, 개발자·디자이너를 만나야만 가능했던 일도 AI를 통해 직접 만들어서 시간을 단축하신다고요.
그런데 흥미로운 건, 지금껏 사람에게 요청하고 대화하던 방식이 그대로 적용되고, 대상만 사람에서 AI로 바뀐 것뿐이라는 거예요. 처음엔 AI에게도 "주문 이탈률 떨어지는 이유 정리해 줘" 이런 식으로 명령만 했는데 결과가 별로였다고 하시더라고요.
지금은 마치 데이터팀 동료에게 요청하듯 한다고 해요. 먼저 상황을 설명하고, 구체적인 요구사항을 전달하고, "이번 프로젝트에서 우리가 보려는 게 주문 사용자 이탈 구간인데요, 이 지표들을 이렇게 묶어서 보고 싶어요"라고 말씀하신대요. 이해를 못 하면 다시 설명하고 또 설명하고요.
AI에게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 지금껏 쌓아왔던 협업의 기술을 그대로 사용하고 계신 거죠. 협업의 대상에 AI 에이전트가 포함되더라도, 협업을 해야 한다는 본질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는 말씀이 정말 강하게 와닿았어요.
무엇을 만드냐보다, 누구와 만드냐
강연의 마지막 메시지가 가장 강렬했어요.
이미준 PO님이 즐겨 읽으신다는 해외 뉴스레터 레니스(Lenny's Newsletter)에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해요. AI가 가장 대체하기 어려운 역할이 뭐냐 하면, 바로 '사람들을 싱크(sync)하는 역할'이라는 거예요. 데이터를 정리하거나 코드를 짜는 건 AI가 점점 잘하게 되지만, 서로 다른 목표와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같은 방향으로 정렬하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라는 거죠.
기존의 기획자들은 '무엇을 만드는 사람이 될 것인가'에 집중했는데, 이제 AI 시대가 되면서 정말 많은 걸 빠르게 만들어낼 수 있게 됐잖아요. 그래서 이제는 무엇을 만드냐보다 누구와 함께 만드냐가 AI 시대 커리어의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 요소가 될 거라는 거예요. 이 한 문장이 강연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였던 것 같아요.
마무리 — 오늘의 협업이 내일의 경쟁력이 됩니다
이미준 PO님의 강연을 통해 배운 건 단순히 기획자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었어요. 협업이란 '같이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성장하는 과정'이라는 것. 상대방을 존중하고, 각자의 영역을 인정하고, 서로의 책임을 이해할 때 비로소 진짜 협업이 시작된다는 것. 그리고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고 정렬하는 역할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라는 것. 오히려 AI 시대일수록 협업 능력이 더 강력한 경쟁력이 된다는 걸 새삼 깨달았어요. 혹시 일하면서 "왜 저 사람은 내 말을 이해 못 할까?", "왜 협업이 이렇게 힘들까?" 하는 생각이 드신다면, 한 번쯤 돌아보세요. 문제는 상대방이 아니라, 나의 협업 방식일 수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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