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잘하고 있는 건가요?" — 이 질문이 자꾸 떠오른다면
직장 생활을 7~10년쯤 하다 보면 이상한 감각이 찾아오더라구요.
신입 때처럼 배움의 설렘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자리를 잡은 시니어라는 확신도 없고. 열심히 하고 있는데 성장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는 그 느낌. "나만 이런 건가?" 싶어서 주변에 물어봐도 다들 비슷한 표정을 짓더라구요.
저는 IT 업계에서 18년을 일하면서 비슷한 감각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개발자로 시작해서 기획자를 거쳐 지금은 인슈어테크 스타트업에서 프로덕트 오너로 일하고 있는데, 이 고민이 처음인 게 아니었어요.
그러다 최근에 영국의 크리에이티브 미디어 '크리에이티브 붐'에서 흥미로운 글을 읽었습니다. 중간 경력 디자이너들이 모여 현실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내용이었는데, 읽다 보니 "이거 디자이너 이야기가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직군을 가리지 않고, 이 감각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더라구요.
오늘은 그 글에서 얻은 인사이트를 바탕으로, 중간 경력의 정체감을 어떻게 풀어낼 수 있는지 솔직하게 풀어보려 합니다.
막혀 있는 건 나 자신이 아니라 직함일 수 있습니다
크리에이티브 붐에 소개된 아트 디렉터 커스틴 머레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막혀 있는 건 디자이너가 아니라 직함 그 자체입니다. 직함이 과거에 머물러 있는 거예요."
저도 이 말이 정확히 와 닿았어요.
10년 전 제가 PM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을 때, 솔직히 스스로를 '반쪽짜리 PM'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기획서는 잘 쓰는데 비즈니스 임팩트는 잘 모르겠고, 개발팀과의 소통은 원활한데 경영진 설득은 늘 불안했거든요. 매번 "내가 아직 부족한 건가, 아니면 그냥 어딘가에 멈춰 있는 건가"를 반복해서 자문했어요.
그런데 돌이켜보면, 문제는 제 실력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타이틀이 정해놓은 기준에 스스로를 끼워 맞추려 하고 있었던 거예요. "PM이면 이 정도는 해야지", "시니어면 저 정도는 되어야지" — 이 틀에 맞추다 보니 항상 어딘가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졌던 겁니다.
직함은 역할의 이름이지, 성장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이 한 문장을 먼저 마음에 새겨두면 좋겠어요.
비정통 경로가 오히려 무기가 됩니다
크리에이티브 붐에 등장하는 디자이너들은 대부분 '비정통 경로'를 가지고 있었어요. 순수미술 전공 후 편집자를 거친 분, 개발자 출신 UI 디자이너, 마케터에서 브랜드 디자인으로 넘어온 분들. 처음에는 이 경로를 핸디캡처럼 여겼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아트 디렉터 루시 엘리엇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건 당신의 강점입니다. 테이블에 가져올 것이 훨씬 더 많은 사람이에요."
저도 솔직히 전형적인 경로의 사람이 아닙니다. 개발자로 시작했고, 그러다 자연스럽게 기획을 하게 됐고, 헬스케어 SaaS를 거쳐 보험 테크 플랫폼까지 왔어요. 누군가 보기엔 전문성이 흐릿해 보일 수 있는 경력이죠.
그런데 이 비정통 경로가 지금 제 가장 큰 경쟁력이라는 걸 이제는 압니다.
개발자 출신이기 때문에 기술적 실현 가능성을 직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고, 기획자 경험이 있기 때문에 사용자 흐름을 구조적으로 설계하고, 다양한 도메인을 경험했기 때문에 새로운 산업을 빠르게 흡수합니다. 이 세 가지가 합쳐졌을 때 비로소 '프로덕트 오너'라는 역할이 온전히 작동하거든요.
자신의 경로를 '결핍'이 아닌 '연결'로 읽어낼 때,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집니다. 커리어를 사다리처럼 수직으로 쌓는 게 아니라 모자이크처럼 연결해 나가는 거예요.
포트폴리오 vs 경험 — IT 업계에서도 똑같이 벌어지는 논쟁
그 글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 중 하나가 포트폴리오와 경험 사이의 논쟁이었어요.
"좋은 디자이너라면 포트폴리오가 전부입니다"라는 쪽이 있는가 하면, "작업을 보고 감동받았다고 했는데 도메인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탈락했습니다"라는 반박도 있었습니다.
IT 업계에서도 이 구도는 그대로예요. 어떤 기술 스택을 쓰느냐가 중요한 회사가 있고, 어떤 문제를 풀어봤느냐가 더 중요한 회사도 있죠. 2025년 채용 트렌드 자료를 보면, 기업들이 경력직 채용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는 항목으로 조직 적합도와 도메인 이해도를 꼽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어요. 단순히 스펙이 좋은 사람보다, 이 조직에서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사람을 원하는 추세인 거죠.
제가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포트폴리오는 문을 열어주고, 경험의 맥락은 신뢰를 만들어 줍니다. 두 가지는 대립하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역할을 해요.
특히 시니어로 넘어가는 구간에서는 결과물의 질보다 "왜 이 판단을 했는가"를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더 중요해집니다. 그 언어는 경험의 두께에서 나오거든요.
선배들이 잘하는 것 중 내가 못하는 것을 찾으세요
크리에이티브 붐에서 그래픽 디자이너 리처드 빅커스가 이런 조언을 했어요. "시니어들이 자신 있게 하는데 자신은 자신 없는 것을 찾아서 연습하라."
이 말이 왜 강력한가 하면, 막연한 성장 욕구를 구체적인 행동으로 바꿔주기 때문이에요. "더 잘해야지"는 실행 계획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 선배는 이해관계자 앞에서 저렇게 명확하게 방향을 제시하는데, 나는 왜 주저하는 걸까?"는 실행 계획의 시작입니다.
저도 초기에 PM으로 일할 때, 경험 많은 기획자들을 보면서 구체적인 격차를 메모했어요.
"저분은 요구사항이 모호할 때 클라이언트를 리드하는 방식이 다르다", "저분은 개발팀이 반발할 때 감정을 건드리지 않고 논리로 설득한다" — 이런 관찰이 쌓이면서 제가 집중적으로 훈련해야 할 지점들이 명확해졌습니다.
성장의 격차를 시각화하는 것. 이것이 중간 경력에서 시니어로 넘어가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에요.
나보다 잘하는 사람 곁에 의도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브랜든 무어의 말은 짧지만 핵심을 찌릅니다. "나보다 잘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작은 자체 프로젝트 팀이라도 좋습니다."
저는 이 말에 완전히 동의하면서 한 가지를 더 덧붙이고 싶어요. 나보다 잘하는 사람 곁에 있는 것뿐 아니라, 나와 다른 분야의 전문가 곁에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요합니다.
프로덕트 오너로 일하면서 저에게 가장 큰 성장을 준 순간들은 혼자 강의를 보거나 책을 읽었을 때가 아니었어요. 보험 언더라이터와 함께 기능 설계를 논의했을 때, 데이터 엔지니어와 함께 이벤트 구조를 설계했을 때, 외부 협력사의 베테랑 컨설턴트에게 거침없는 피드백을 받았을 때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는 것, 그게 책으로는 절대 배울 수 없는 살아 있는 지식이에요.
환경을 바꾸는 것도 전략입니다 — 단, 냉정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저평가받고 있다면, 당신은 맞지 않는 곳에 있는 겁니다." 이 말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현실에서 "내가 부족한 건지, 환경이 문제인 건지"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에요.
저는 이렇게 판단합니다.
스스로 더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있고, 더 많은 책임을 요청했는데 지속적으로 거절당하고,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면 — 그건 환경의 문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면 책임이 주어지는데 두렵고, 결정을 자꾸 미루게 되고, 배움의 속도가 느리다면 — 그건 내 성장의 과제가 남아 있는 것이에요.
2025년 채용 시장 데이터를 보면, 기업들이 경력직 채용 시 신입보다 약 4배 더 많이 채용하고 있다는 수치가 나와 있어요. 그만큼 실력 있는 중간 경력자는 시장에서 여전히 수요가 높습니다. 이직은 성장을 자동으로 해결해주지 않아요. 하지만 성장 자체가 구조적으로 막혀 있는 환경에서 계속 버티는 것도 전략이 아닙니다.
마무리
중간 경력의 막막함은 직군을 가리지 않습니다. 디자이너든 기획자든 개발자든 PM이든 —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감각이에요.
그 막막함을 돌파하는 방법은 직함이 아니라 방향에서 시작됩니다. 비정통 경로는 약점이 아니라 독보적인 관점이고, 선배들과의 격차를 구체적으로 시각화하며, 나보다 잘하는 사람 곁에 의도적으로 머무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성장 전략입니다.
성장은 수직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아요. 오늘, 자신이 원하는 성공의 모습을 딱 한 줄만 써보는 것에서 시작해 보세요. 그 한 줄이 방향이 되고, 방향이 다음 스텝을 만들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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