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MF보다 먼저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좋은 시장이 제품을 끌어당긴다."
2007년 실리콘밸리의 전설 마크 앤드리슨이 정리한 스타트업 성공 공식이에요. 팀, 제품, 시장 중에서 시장이 제일 중요하다는 거였죠. 수없이 인용된 명언이고, 실제로 맞는 말이기도 해요.
그런데 2025년 지금, 이 공식에 결정적인 변수가 하나 더 생겼어요. 바로 AI 시대에만 존재하는 새로운 전제 조건입니다.
바로 모델-마켓 핏(MMF, Model-Market Fit)이에요.
제품-시장 적합성(PMF)보다 먼저 따져봐야 할 질문이 있어요. 지금 현재 AI 모델이, 내가 타겟하는 시장이 원하는 걸 실제로 해낼 수 있는가? 이게 안 되면 아무리 좋은 팀이, 아무리 거대한 시장을 노려도 소용없어요.
투자 데이터를 보면 더 명확해집니다. 2024년 전 세계 AI 스타트업에 쏟아진 투자금은 무려 약 1,000억 달러로, 2023년 대비 80% 가까이 급증했어요. 그 중 상당수가 아직도 실제 수익을 못 내고 있어요. 이유가 뭘까요? 투자는 쏟아지는데 왜 제품은 작동하지 않을까요?
MMF가 없기 때문이에요.
리걸테크가 갑자기 폭발한 건 시장 때문이 아니었다
법률 AI 시장을 한번 봐요.
2016~2022년 사이, 로펌들은 자동화를 간절히 원했어요. 시장은 분명히 존재했고, 수요는 명확했죠. 근데 당시 AI 스타트업들은 투자받기 정말 어려웠어요.
이유는 간단했어요. 당시 모델들이 변호사들이 진짜 필요로 하는 걸 못 했거든요.
BERT 같은 초기 모델들은 문서 분류는 잘했어요. 계약서 종류를 구분하거나 잠재적 리스크를 표시하는 정도. 근데 법률 업무의 핵심은 거기서 끝나지 않아요. 복잡한 판례를 종합해서 법률 메모를 작성하고, 특정 사실 패턴에 맞는 문서를 처음부터 생성하는 거죠. 그게 안 됐어요.
그러다 2023년 GPT-4가 등장하면서 상황이 바뀌었어요. 18개월 만에 리걸테크 스타트업들이 수억 달러의 투자를 받았어요. 톰슨로이터는 케이스텍스트를 약 6억 5천만 달러에 인수했고, 하비(Harvey)라는 리걸테크 스타트업은 2025년 현재 기업가치 30억 달러를 인정받으며 시리즈D 투자까지 완료했어요.
국내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어요. 2025년 상반기 글로벌 리걸테크 투자액은 약 35억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44%나 증가했고, 국내 스타트업 엘박스는 300억 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한 뒤 일본 시장 공략에 나섰어요.
시장이 갑자기 커진 게 아니에요. 모델의 능력 임계점이 돌파된 거예요.
코딩 어시스턴트도 마찬가지 이야기예요
커서(Cursor)라는 AI 코딩 툴 기억하시나요?
클로드 3.5 소네트가 나오기 전에 써본 분들은 기억하실 거예요. 신기한 데모 수준이었어요. 설치했다가 삭제하고, 또 설치했다가 삭제하는 패턴. 매력적이긴 한데 실제 업무 도구로 쓰기는 뭔가 부족한 느낌.
그러다 2024년 6월 클로드 3.5 소네트가 출시된 이후 일이 바뀌었어요. 개발자들 사이에서 커서 없이는 일 못 하겠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도구를 쓰는 게 아니라, 전체 코드베이스를 이해하는 파트너와 함께 일하는 느낌이 된 거예요.
깃허브 통계를 보면, AI 코딩 어시스턴트 사용자 수가 2023년 약 100만 명에서 2024년 말에는 수백만 명 수준으로 폭발적으로 늘었어요. 새로운 기능이 추가되어서가 아니에요. 기반 모델이 임계점을 넘었기 때문이에요.
MMF 없이 시장이 아무리 커도 소용없다
반면 시장이 명확히 있어도 안 되는 케이스도 있어요.
수학 증명 분야를 볼게요. 연구기관, 방산업체, 테크 기업들은 진짜 수학적 추론을 할 수 있는 AI에 엄청난 비용을 낼 의향이 있어요. 근데 가장 발전된 모델도 아직 새로운 정리를 일관되게 증명하지 못해요. 알려진 증명은 검증할 수 있지만, 미해결 수학 문제에 대한 엄밀한 증명은 아직 못해요.
금융 서비스도 비슷해요. 투자은행이나 헤지펀드는 포괄적인 금융 분석을 자동화하고 싶어 해요. 성공한 거래 하나가 수백억 원의 수수료를 만들어내니까요. 근데 벤치마크 데이터를 보면, 법률 분야에서 최고 모델들이 87%대 정확도를 기록하는 반면, 금융 에이전트 태스크에서는 50% 중반대에 그쳐요. 30포인트 가까이 차이가 나요.
법률은 MMF가 있고, 금융은 아직 없다는 거예요.
'인간이 개입한다'는 건 사실 경고 신호다
MMF가 있는지 없는지 구분하는 가장 확실한 신호가 있어요. 제품 소개에서 '휴먼 인 더 루프(Human in the Loop)'가 어떻게 등장하는지 보는 거예요.
MMF가 있을 때, 인간의 개입은 기능이에요. AI가 일을 하고, 사람이 감독하는 구조. 품질을 유지하고, 신뢰를 쌓고, 예외 케이스를 처리하는 역할이에요.
MMF가 없을 때, 인간의 개입은 목발이에요. AI가 핵심 작업을 못 한다는 사실을 감추는 장치. AI가 보완되는 게 아니라 보상받는 구조예요. 인간을 빼면 제품이 작동하지 않아요.
테스트는 간단해요. 인간의 수정 작업을 전부 제거했을 때, 고객이 여전히 돈을 낼까요? 답이 아니오라면, MMF가 없는 거예요. 그건 데모예요.
'지금 만들까, 아니면 기다릴까'는 진짜 어려운 선택이에요
여기서 진짜 어려운 전략적 딜레마가 생겨요.
현재 MMF에 맞춰 지금 만들 것인가, 아니면 미래 MMF를 예상하고 선제적으로 인프라를 구축해 놓을 것인가.
MMF가 지금 없다면, 창업은 다른 사람의 로드맵에 베팅하는 거예요. 앤트로픽이나 오픈AI가 언제 어떤 수준의 능력을 출시할지, 내가 통제할 수 없어요. 런웨이를 태우면서 기다리는 셈이죠.
더 무서운 건, 어떤 능력이 필요한지 잘못 예측할 수 있다는 거예요. 80%에서 99% 정확도로 가는 격차가 5년이 걸릴 수도 있고, 아예 내가 상상했던 방식으로는 좁혀지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기다리는 게 늘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모델 능력이 풀리는 순간에 필요한 건 모델 하나가 아니거든요. 도메인 특화 데이터 파이프라인, 규제 관계, 수년간 쌓은 고객 신뢰, 깊은 워크플로우 통합, 전문가들이 실제로 어떻게 일하는지에 대한 이해. 이 모든 게 필요해요.
리걸테크 스타트업들이 GPT-4 나오자마자 성공한 게 아니에요. 이미 인프라를 구축해두고 있던 거예요.
가장 위험한 건 '곧 될 것 같은' 중간 지대예요
전략적으로 가장 위험한 건 MMF가 24~36개월 후에 올 것 같은 경우예요.
임박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이에 여러 차례 펀딩 라운드를 소화해야 해요. 확신과 런웨이, 둘 다 필요해요.
그래서 시장 규모가 중요해요. 의료와 금융 서비스처럼 수십 조 원 규모의 시장을 노린다면, 리스크-보상 계산이 완전히 달라지거든요. 그 가능성 하나만 보고 앤트로픽도, 오픈AI도 올인하고 있잖아요.
수식으로 단순하게 표현하면 이래요.
기댓값 = MMF 도착 확률 × 시장 규모 × 예상 점유율
이 세 가지를 냉정하게 계산해서, 기다릴 가치가 있는 시장인지 판단해야 해요.
80%와 99%의 격차는 실제로 무한대에 가깝다
규제가 없는 분야에서는 80% 정확도도 충분히 가치를 만들 수 있어요. 마케팅 카피 초안을 80% 수준으로 써주는 AI는 사람이 많이 수정해도 생산성을 높여줘요.
근데 금융, 법률, 의료 같은 규제 산업에서는 얘기가 달라요.
중요한 조항의 20%를 놓치는 계약서 검토 도구는 변호사를 돕는 게 아니라 법적 책임을 만들어요. 다섯 번 중 한 번 틀리는 의료 진단은 제품이 아니라 소송감이에요. 80%에서 99% 사이의 격차는 실무적으로 종종 무한대예요. 유망한 데모와 실제 프로덕션 시스템의 차이가 바로 거기에 있어요.
지금 많은 AI 스타트업이 이 격차에 갇혀서, 데모로 투자를 받아놓고 실제 작동하는 능력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2025년 현재, AI 스타트업의 B 시리즈 기업가치는 비AI 스타트업보다 60% 이상 높게 평가받는다는 데이터가 있는데, 그 안에 데모 거품이 얼마나 있는지 아무도 몰라요.
에이전틱 시대, 다음 임계점이 온다
지금 이야기한 MMF 사례들, 법률 문서 검토나 코딩 보조는 사실 단기 작업이에요. 프롬프트 입력, 결과 출력, 몇 번의 툴 호출. 몇 초나 몇 분 안에 끝나는 일이에요.
근데 가장 가치 있는 지식 노동은 그렇지 않아요.
금융 애널리스트는 며칠 동안 모델을 만들고 가정을 테스트하고 수십 개 소스에서 정보를 종합해요. 전략 컨설턴트는 몇 주에 걸친 리서치와 인터뷰, 분석을 반복해요. AI가 이런 작업을 자율적으로 수행하려면, 단순히 툴을 쓸 수 있는 것 이상이 필요해요.
지속성(며칠 동안 목표와 맥락 유지), 복구(실패를 인식하고 대안 시도), 조정(복잡한 목표를 하위 작업으로 분해), 판단(언제 진행하고 언제 멈춰야 하는지 아는 것).
지금 에이전트는 몇 분짜리 작업을 처리해요. 다음 단계 에이전트는 며칠짜리 작업을 처리해야 해요. 이게 점진적 개선이 아니라 능력의 상전이예요. 그 임계점이 언제 오느냐에 따라, 또 다른 산업에서 갑자기 유니콘이 쏟아지게 될 거예요.
마무리
마크 앤드리슨의 핵심 통찰은 시장이 제품을 끌어당기는 중력을 만든다는 거였어요. AI 시대의 추가 통찰은 하나예요. 모델 능력이 그 중력이 시작되기 위한 전제 조건이라는 거예요.
아무리 크고 간절한 시장도, 작동하지 않는 제품을 끌어당길 수는 없어요. AI에서 작동하지 않는다는 건 결국 모델이 결정해요. 아무리 아름다운 UI, 정교한 데이터 파이프라인, 훌륭한 팀이 있어도, 기반 모델이 핵심 작업을 못 하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창업자라면, 기획자라면, 지금 이 질문 하나를 먼저 던져봐야 해요.
지금 이 모델로 실제로 그 일을 해낼 수 있는가?
MMF → PMF → 성공. 첫 단계를 건너뛰면 두 번째는 불가능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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