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회사, 거의 죽을 뻔했어요"
글로벌 SaaS 업계에서 꽤 충격적인 고백이 나왔습니다. Intercom의 공동창업자이자 CEO인 Eoghan McCabe가 2026년 3월, 자신의 뉴스레터에 직접 쓴 글인데요. 제목 자체가 심상치 않았어요. "SaaS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뿐이다."
그 '단 하나의 방법'이 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생각보다 훨씬 불편하고 두려운 선택입니다. 그리고 Intercom은 실제로 그 선택을 했고,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국내 SaaS 스타트업, 인슈어테크, 핀테크, 헬스케어 플랫폼까지 B2B 소프트웨어 시장에 있는 분들이라면 이 이야기가 남의 일처럼 들리지 않을 거예요. 한번 찬찬히 살펴볼게요.
5분기 연속 신규 매출 제로 — 망할 뻔한 Intercom 이야기
Intercom은 2011년 아일랜드에서 창업한 고객 서비스 플랫폼입니다. 한때 수십억 달러 가치의 유니콘으로 주목받았던 회사인데, 2022년 무렵 상황이 급격히 나빠졌어요.
McCabe는 건강 문제로 2년간 CEO 자리를 비웠고, 복귀했을 때 회사는 5분기 연속으로 신규 ARR(연간 반복 매출)이 사실상 제로에 가까운 상태였습니다. 성장이 멈춘 게 아니라, 역성장 직전까지 몰렸던 거죠. 그리고 그로부터 딱 한 달 뒤, ChatGPT가 세상에 등장했습니다.
그가 2026년 현재 공개한 수치를 보면 이 이야기가 얼마나 극적인지 알 수 있어요. Intercom은 현재 연매출 4억 달러(약 5,600억 원)를 넘겼고, AI 에이전트 Fin은 단독으로 1억 달러 달성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더 놀라운 건 성장 속도인데요. 글로벌 대형 소프트웨어 기업 중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회사가 됐다는 겁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요?
그들이 선택한 것: 창조적 파괴
McCabe의 글에서 핵심 단어는 "creative destruction(창조적 파괴)"입니다. 경제학자 슘페터가 자본주의를 설명할 때 쓴 개념인데, Intercom은 이걸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자기 회사에 적용했어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냐면, 기존의 가치관을 폐기하고 채용과 해고 기준을 완전히 바꿨습니다. 회사의 미션을 AI 에이전트 중심으로 다시 썼고, 목표 지표도 Fin 매출로 교체했어요. 심지어 이사회 구성까지 바꿨는데, "성숙하고 경험 많은" 사외이사들을 내보내고 스타트업 창업자들을 앉혔습니다.
그리고 가장 극적인 결정은 이겁니다. Fin이 전체 매출의 한 자릿수 퍼센트밖에 안 될 때, 전체 R&D 예산의 80%를 Fin에 몰아넣은 거예요. 마케팅도 100% Fin으로 집중했고, 100만 달러짜리 fin.ai 도메인을 따로 사서 새 브랜드를 만들었습니다. 기존 Intercom 브랜드는 뒤로 물렸어요.
더 과감한 건 가격 정책이었어요. 기존 워크플로우 도구 중심의 과금 모델을 버리고, AI가 고객 문의를 성공적으로 해결할 때만 건당 0.99달러를 받는 성과 기반 가격 모델로 갈아탔습니다. 이 과정에서 무려 6,000만 달러(약 840억 원) 규모의 기존 매출을 스스로 없앴습니다.
자기 돈을 자기 손으로 지우는 결정. 보통 회사에서 이런 제안을 하면 회의실이 조용해질 텐데, Intercom은 해냈습니다.
"내 것을 내가 파괴하지 않으면, 남이 파괴한다"
McCabe가 이 글에서 가장 강조하는 메시지는 이겁니다. AI 에이전트 시대에 기존 SaaS 기업이 팔던 워크플로우 도구는 점점 가치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에이전트는 사람이 쓰는 툴이 필요 없고, 에이전트와 함께 일하는 사람도 다른 종류의 도구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글로벌 AI 지출은 2025년 기준 6,400억 달러(약 880조 원)로, 같은 해 SaaS 시장 전체의 두 배 수준이었습니다. 전년 대비 성장률은 SaaS의 네 배 이상입니다. 반면 초기 단계 SaaS 투자는 5분기 연속 하락했습니다. 자금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가 이 수치 하나로 명확하게 보이죠.
국내 SaaS 시장은 한국IDC 전망 기준으로 2026년 3조 614억 원 규모까지 성장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시장 자체는 커지고 있지만, 문제는 그 시장의 질적 변화입니다. 많은 기업이 AI를 "추가 기능"으로 붙이는 데 그치고 있어요. Intercom처럼 회사 전체를 뒤집지 않고, 기존 제품에 AI 탭 하나 추가하는 수준으로 대응하는 거죠.
McCabe의 표현을 빌리자면, "당신의 CRUD 앱 비즈니스는 미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겁니다. 데이터 입력, 검색, 수정이 중심인 전통적인 소프트웨어 구조는 에이전트 AI가 그 역할을 대신하는 순간 존재 이유가 흐려집니다.
Fin은 어떻게 1억 달러짜리 제품이 됐을까
Fin의 자율 해결률은 출시 초기 약 25% 수준이었지만, 현재는 평균 56%까지 올라왔습니다. 각 포인트를 올리기 위해 끊임없는 A/B 테스트가 반복됐다고 합니다.
자동화된 문의 해결 한 건은 인간 상담원이 처리할 때와 비교해 비용을 80~90%까지 절감할 수 있습니다. 기업 입장에서 고객 지원 비용이 얼마나 큰지 생각해보면, 이 숫자가 얼마나 강력한지 느껴지죠.
경쟁사들이 건당 2~4달러를 받는 것과 비교해 0.99달러라는 가격은 상당히 파격적입니다. 그런데도 수익성이 유지되는 이유는 Intercom이 자체 AI 모델을 개발했고, 50명이 넘는 박사급 AI 연구팀을 내부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Intercom은 AI 고객 에이전트 기술 확장을 위해 2억 5천만 달러의 부채 금융을 조달했습니다. 이는 새로운 역량의 AI 에이전트 출시를 준비하고, 채용과 제품 개발, 글로벌 확장을 가속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망할 뻔했던 회사가 이제는 성장을 위해 수천억 원을 추가로 조달하고 있는 겁니다.
한국 SaaS 생태계가 직면한 더 복잡한 상황
사실 한국 시장은 글로벌 상황보다 더 복잡합니다. 국내는 공공·민간 모두에서 여전히 온프레미스와 SI 중심 구조가 강하게 유지되고 있어요. 글로벌이 SaaS가 표준화된 이후 AI 전환을 맞이한 반면, 한국은 SaaS 확산 자체가 덜 된 상태에서 AI 재편이 먼저 닥친 특수한 상황입니다.
국내 기업들이 기존 온프레미스 방식을 벗어나 SaaS로 전환하는 사례가 늘면서 변화의 시발점을 맞이하고 있다는 점은 의미 있는 흐름입니다. 하지만 CES나 MWC 같은 가전·모바일 박람회에 한국인들이 많은 반면, 글로벌 SaaS 행사에서는 한국인을 거의 만나지 못한다는 점은 한국 소프트웨어 산업의 기반이 약하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흐름이 위기일까요, 기회일까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Intercom의 사례가 보여주는 건 분명합니다. 업력이 15년이 됐든, 한때 성장이 멈췄든 상관없다는 거예요. 핵심은 과거를 파괴할 용기가 있느냐입니다.
시장에서는 "승자와 도태자가 명확히 갈리는 구조적 전환이 진행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산업별 맞춤형 SaaS와 AI를 결합한 통합 플랫폼을 내세운 기업들은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고, 그렇지 않은 기업들은 급속히 존재감이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자기잠식, 두렵지만 피할 수 없는 선택
많은 기업이 AI 전환을 망설이는 가장 큰 이유는 자기잠식(cannibalization) 우려입니다. "AI 도입하면 기존 매출이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죠.
McCabe는 이 질문에 단호하게 답합니다. "그렇다, 줄어든다. 그래도 해야 한다. 안 하면 경쟁사가 해준다."
가트너는 2026년까지 전 세계 기업의 80%가 버티컬 AI를 도입할 것으로 예상했으며, 맥킨지도 AI의 총 가치 중 70% 이상이 산업 맞춤형 솔루션에서 창출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이 흐름은 선택이 아닌 방향의 문제입니다.
Intercom의 목표는 Fin을 단순한 고객 서비스 에이전트를 넘어, 리드 발굴부터 온보딩, 지원, 성공 관리, 업셀까지 고객 여정 전체를 커버하는 통합 Customer Agent로 진화시키는 것입니다. 좌석 기반 SaaS 라이선스를 팔던 회사가 이제는 AI가 실제로 해결한 결과에만 돈을 받는 구조로 바뀐 거예요. 이게 패러다임의 전환이 아니면 뭘까요.
살아남는 기업의 공통점, 딱 하나
Intercom의 이야기에서 배울 수 있는 본질은 단순합니다. 변화 앞에서 기존의 성공 방정식을 지키려는 본능을 이겨내는 것, 그게 전부입니다.
AI 에이전트가 기존 SaaS 툴의 상당 부분을 대체할 것이라는 건 이제 논쟁의 여지가 없는 방향입니다. 문제는 그 파도 앞에서 서핑보드를 꺼내느냐, 모래 위에 서 있느냐의 차이입니다.
자기 회사를 스스로 파괴할 수 있는 기업만이 새로운 시대를 설계할 수 있어요. 인슈어테크든, 핀테크든, 헬스케어 SaaS든, 이 원칙은 분야를 가리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회사에서 지금 "이 사업은 건드리지 말자"고 모두가 암묵적으로 합의한 영역이 있다면, 그 영역이 바로 다음 경쟁사의 먹잇감이 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 불편한 진실을 직면하는 것, 그게 Intercom CEO가 말하는 SaaS 생존의 유일한 방법입니다.
마무리
Eoghan McCabe의 고백은 성공담이 아닙니다. 두려움을 이겨낸 선택의 기록입니다. 15년 된 회사가 5분기 연속 신규 매출 제로를 찍은 뒤, 6,000만 달러 매출을 스스로 지우고 R&D 예산의 80%를 미래에 베팅했습니다. 그리고 2년 만에 연매출 4억 달러, AI 부문만 1억 달러를 눈앞에 두는 회사가 됐습니다. AI 시대에 살아남고 싶다면, 먼저 자신이 쌓아온 것들과 작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 회사에서 "절대 건드리지 말자"고 약속된 그 영역, 한번 다시 들여다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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