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 회사랑 경쟁하면 이길 수 있을까요?"
스타트업 창업자라면 한 번쯤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봤을 거예요.
시장엔 이미 수십 년을 버텨온 레거시 기업들이 있습니다. 영업 조직은 방대하고, 고객사도 이미 확보됐고, 브랜드는 확고합니다. 그걸 보면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자신이 없어지는 건 사실 당연한 반응이에요.
그런데 흥미로운 투자자가 한 명 있습니다. Scale Venture Partners의 파트너 알렉스 닉헨케(Alex Niehenke)는 정확히 반대 시각으로 시장을 봅니다.
"기존 강자들이 고객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곳을 찾아보세요. 그게 기회입니다."
그가 건설, 보험, 법률, 물류 분야에서 수십 개 스타트업에 투자하면서 얻은 결론인데요.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한국 B2B SaaS 창업자 관점에서 풀어볼게요.
버티컬 AI가 갑자기 뜨는 이유
요즘 VC들이 "버티컬 AI"라는 단어를 자주 쓰죠. 버티컬 AI란 특정 산업에 특화된 AI 솔루션을 말합니다. 범용 AI가 아니라 보험업계용, 법률업계용, 헬스케어용처럼 깊게 파고드는 방식이에요.
왜 갑자기 이게 뜨는 걸까요?
GPT, Claude 같은 기초 모델이 강력해지면서 수평적 소프트웨어들이 대체될 위험이 커졌어요. "그냥 AI한테 물어보면 되는데?" 싶은 범용 툴들이 위협을 받고 있는 거죠. 반면 버티컬 시장은 다릅니다. 규제, 독점 데이터, 깊은 워크플로우가 있어서 모델 하나가 들어온다고 바뀌지 않거든요.
가트너는 2026년까지 전 세계 기업의 80%가 버티컬 AI를 도입할 것으로 전망했고, 맥킨지는 AI 총 가치의 70% 이상이 산업 맞춤형 솔루션에서 창출될 거라고 분석했습니다. 국내도 마찬가지예요. 한국IDC에 따르면 국내 SaaS 시장은 매년 15% 이상 성장하고 있는데, 그 안에서도 산업 특화형 솔루션이 성장을 이끌고 있습니다.
버티컬 AI의 본질은 "특정 업계의 오래된 불편함을 데이터와 자동화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레거시 기업의 빈틈이 생기기 시작해요.
레거시 강자의 진짜 약점은 뭘까요
기존 강자들은 왜 대응이 느릴까요? 능력이 없는 걸까요? 아닙니다.
알렉스는 PE(사모펀드)가 인수한 소프트웨어 기업들을 대표적인 예로 듭니다. PE에 인수된 회사들은 대개 레버리지(대출)가 높고, 경영진 보상 체계는 기존 수익을 지키는 방향으로 맞춰져 있어요. 자기 사업을 스스로 잠식하는 혁신보다 현상 유지가 훨씬 이익이 되는 구조인 겁니다.
이런 회사들의 공통점을 보면 패턴이 있어요.
고객 충성도는 낮지만 대체 비용이 높아서 어쩔 수 없이 씁니다. 매년 가격은 오르지만 제품 개선은 더딥니다. NPS(순추천지수)가 바닥임에도 경쟁사가 없으니 버텨온 거예요.
Harvey 같은 법률 AI 스타트업이 변호사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나요?" 물었을 때 봇물이 터진 건 이유가 있습니다. 고객들이 오랫동안 참아왔던 거예요. Westlaw, LexisNexis 같은 법률 정보 서비스가 수십 년간 독점에 가까운 지위를 누리면서 고객 불만이 쌓여왔던 겁니다.
국내로 보면 보험 GA 플랫폼, 병원 EMR, 공공기관 연동 시스템들이 딱 이 구조입니다. "어쩔 수 없이" 쓰고 있는 고객들이 분명히 존재하는 시장이에요.
"사랑받는 시스템"이 레거시를 이긴다
알렉스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개념이 있어요. "System of Love(사랑받는 시스템)"입니다.
레거시 기업들은 대개 "System of Record(기록 시스템)"예요. 불편해도 데이터가 다 거기 있으니까 묶여서 씁니다. 하지만 사랑받지는 못합니다.
스타트업이 이길 수 있는 진짜 레버리지는 뭘까요. 고객이 제품을 너무 좋아해서, 없애려 하면 직접 목소리를 높이는 상황을 만드는 거예요.
계약으로 묶어두는 게 아닙니다. NPS가 높아서, 일이 실제로 빨라지고 편해져서, 고객이 스스로 지키려 하는 상태를 만드는 겁니다.
왜 이게 중요할까요? 레거시 강자가 API를 끊거나 통합을 막거나 소송을 걸어오는 "적대적 전환" 상황이 왔을 때, 그때 버텨줄 수 있는 건 충성 고객뿐이기 때문입니다.
Procore가 좋은 예예요. 건설 현장 특화 SaaS인데, 초창기엔 누구도 이 시장에 투자하지 않았습니다. TAM이 작아 보인다는 이유에서요. 알렉스의 팀도 투자를 거절했다고 직접 밝혔는데, 지금 Procore는 시가총액 100억 달러를 넘긴 회사가 됐습니다.
레거시가 반격할 때, "킬 윈도우"를 버텨라
레거시 기업은 제품 경쟁에서는 질 수 있지만, 다른 무기가 있어요.
알렉스가 꼽는 레거시의 전형적인 반격 수단은 세 가지입니다. API 차단이나 연동 거부, 소송 또는 법적 압박, 그리고 공급망이나 유통 채널 통제예요.
Dollar Shave Club 사례가 인상적이에요. 바이럴 마케팅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했는데, 면도날을 공급할 수 있는 공장이 전 세계에 다섯 곳뿐이었고 대부분이 경쟁사 소유였습니다. 창업자는 직접 아시아로 날아가 수익을 포기하면서까지 공급처를 확보했고, 결국 P&G에 10억 달러에 매각됐죠.
핵심 교훈은 이겁니다. 분위기를 타고 있을 때 유통을 확보하라. 생태계와 싸우는 게 아니라 협상하는 겁니다.
한국에서도 구조는 동일해요. 보험 GA 플랫폼, 병원 EMR, 공공기관 연동 시스템들이 인터페이스나 데이터 연동을 틀어쥐고 있는 경우, 신규 사업자는 "적대적 차단 시나리오"를 반드시 미리 설계해야 합니다.
대형 시스템과 싸우지 말고, 우회하라
알렉스가 제시하는 실전 전술은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첫째, 기존 시스템에서 독립적으로 작동하도록 제품을 설계하세요. 연동이 끊기더라도 고객이 계속 쓸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2위, 3위 시스템과 먼저 파트너십을 맺으세요. 1위 강자가 적대적으로 나올수록 2위, 3위는 스타트업의 성장 스토리를 함께 가져갈 이유가 생깁니다. 셋째, 법적 리스크가 있는 API 의존도를 낮추세요. 대형 ERP나 SoR이 ARR의 40% 이상을 좌우하는 구조라면, 하루아침에 사업 절반이 날아갈 수 있습니다.
알렉스의 표현 중에 이런 말이 있어요. "레거시 시스템을 우회하는 코드를 짜서 그걸 출시해버려라." 기술적으로 에뮬레이션하거나 독립적인 경로를 만들어서, 그들이 연동을 끊어도 고객이 계속 쓸 수 있게 만드는 겁니다.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전략이죠.
"시장이 작아 보인다"는 건 기회의 신호일 수 있다
TAM이 작아 보이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진짜 작은 경우고, 다른 하나는 아직 아무도 그 시장을 제대로 공략하지 않아서 데이터 자체가 없는 경우입니다.
국내 보험 GA 플랫폼, 의료기관 CRM, 공공 조달 시스템 같은 영역이 겉으로는 작아 보일 수 있어요. 하지만 이 시장 안에 있는 비효율과 고객 불만의 크기를 직접 보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규모보다 먼저, "이 안에서 고객이 얼마나 불행한가"를 봐야 합니다. 그 불행의 크기가 시장의 진짜 크기입니다.
버티컬 AI의 선구자 비바시스템즈(Veeva Systems)의 피터 개스너는 "AI가 산업별 특화 지식과 결합할 때 그 가치가 10배 이상 증폭된다"고 말했어요. 기초 모델이 강해질수록 오히려 산업 도메인 지식을 가진 버티컬 플레이어가 더 강해지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마무리
레거시 기업을 이기는 건 더 많은 예산도, 더 큰 팀도 아닙니다.
그들이 오랫동안 외면해온 고객의 불편함을 진지하게 해결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고객에게 사랑받는 제품을 만드세요. 레거시가 API를 끊어도 고객이 직접 항의할 만큼.
B2B SaaS를 만들고 있다면, 지금 우리 제품이 "기록되는 시스템"인지 "사랑받는 시스템"인지 한 번 점검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 차이 하나가 레거시와의 싸움에서 가장 현실적인 해답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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