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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칼럼/경험공유

기획서는 죽었는가? AI 시대, PRD가 진화하는 3가지 이유

 

기획서, 이제 AI한테 맡기면 되는 거 아닌가요?

요즘 현장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가 이거더라고요. "ChatGPT한테 PRD 써달라고 하면 5분 안에 나오는데, 굳이 기획자가 며칠씩 붙잡고 있을 필요가 있냐"는 거죠.

틀린 말은 아닙니다. 실제로 AI는 그럴듯한 기획서 초안을 순식간에 만들어냅니다. 구조도 있고, 문장도 매끄럽고, 항목도 빠진 게 없어 보입니다. 맥킨지 보고서에 따르면 기획 업무에 생성형 AI를 도입했더니 기획자 생산성이 40%나 향상됐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PRD(Product Requirement Document), 이제 정말 AI가 다 해주는 걸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닙니다. 오히려 AI 시대일수록 기획자의 역할은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오늘 하나씩 짚어드릴게요.

기획서의 역사를 먼저 알아야 해요

PRD가 처음 자리를 잡은 건 1990년대, 폭포수(워터폴) 방식이 지배하던 시절입니다. 당시 기획서는 20~3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문서였어요. 제품의 모든 변경 사항을 빠짐없이 기록하는, 일종의 공식 설명서 역할을 했습니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분위기가 확 바뀌었어요. 애자일과 린(Lean) 방법론이 퍼지면서 "두꺼운 스펙 문서는 구식"이라는 인식이 생겼고, '사용자 스토리' 중심으로 기획의 무게가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재택근무가 일상이 되면서 팀 간 얼라인먼트가 기획서의 핵심 기능으로 떠올랐어요. 노션, 컨플루언스 같은 도구들이 정적인 문서를 대체하면서 기획서는 '살아있는 문서'가 됐습니다.

그리고 2022년 말, ChatGPT 등장. 기획서의 역사에서 또 한 번의 전환점이 찾아온 거죠.

AI가 만드는 기획서, 어디가 문제일까요?

AI가 만든 기획서를 받아 보면 처음엔 꽤 인상적입니다. 배경 설명도 있고, 목표도 있고, 기능 목록도 있어요. 그런데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그 이유가 뭔지 아세요?

AI는 '완성된 것처럼 보이는 문서'를 만들 뿐, '올바른 결정을 위한 문서'를 만들지는 못합니다. AI는 우리 고객이 어떤 불편함을 겪고 있는지, 우리 팀이 지금까지 어떤 실패를 경험했는지, 이번 기능이 정말 지금 만들어야 하는 건지를 모릅니다. 인터넷에 넘쳐나는 일반적인 패턴을 기반으로 텍스트를 생성할 뿐이에요.

PMI(프로젝트 관리 협회)의 보고서에서는 실패한 프로젝트의 47%가 불분명한 요구사항 때문에 발생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AI가 초안을 아무리 빨리 만들어줘도, 그 안에 담겨야 할 '맥락'과 '판단'은 사람이 채워줘야 한다는 뜻이에요.

'완성된' 기획서를 갖고 팀이 달려갔다가, 정작 고객이 원하지 않는 기능을 완벽하게 만들어놓는 상황. 남의 이야기 같지 않죠?

가장 많이 하는 오해 — 프로토타입이 기획서를 대신할 수 있다

현장에서 또 자주 듣는 말이 있어요. "기획서 길게 쓰지 말고, 그냥 빠르게 만들어서 보여주자."

프로토타입 먼저 만들고 피드백 받으면 된다는 논리인데, 분명히 일리 있는 말입니다. 보여주는 게 설명하는 것보다 강력할 때가 많으니까요.

그런데 프로토타입만으로 채울 수 없는 빈자리가 있습니다.

프로토타입은 "이게 가능한가"를 보여줄 수 있지만, "왜 이걸 만들어야 하는가"를 설명하지는 못해요. 투자자나 경영진, 타 부서에 비즈니스 가치를 납득시키려면 숫자와 논리가 담긴 문서가 필요합니다. 기술적 실현 가능성을 사전에 검토하는 단계도 반드시 있어야 하고요.

프로토타입은 기획서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 기획서와 함께 작동할 때 가장 강력합니다.

AI 시대 기획서가 갖춰야 할 3가지 조건

그렇다면 지금 시대에 좋은 기획서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세 가지를 반드시 갖춰야 합니다.

첫째, 명확한 방향(북극성)이 있어야 합니다. 기능 목록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이 제품이 궁극적으로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 팀 전체가 공유할 수 있는 하나의 방향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방향 없는 기능 목록은 지도 없는 여행과 같아요.

둘째, 사용자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실제 고객이 겪는 불편, 인터뷰 데이터, 현장에서 나온 증거가 기획서에 녹아 있어야 합니다. 고객 인사이트 없이 쓴 기획서는 결국 가설의 집합일 뿐입니다. 제품 리더들이 전략 수립에서 가장 중요하게 꼽는 게 고객 인사이트라는 건 이유가 있는 거예요.

셋째, 비즈니스 가치와 시장 인식이 담겨야 합니다. 이 기능을 만들었을 때 회사에 어떤 이익이 생기는지, 경쟁 환경에서 어떤 우위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빠른 출시가 목표가 아니라, 의미 있는 출시가 목표여야 합니다.

기획서의 새로운 형태 — 살아있는 모듈형 문서

이 세 가지 조건을 갖추되, 형식은 점점 유연해지고 있어요.

실험적인 기능이라면 한 페이지짜리 문제 정의서로 충분합니다. 핵심 아키텍처를 바꾸는 대규모 개발이라면 상세한 2~3페이지 사양서가 필요할 수 있어요.

중요한 건 분량이 아닙니다. 문서가 팀의 의사결정 흐름과 연결되어 있는지가 핵심이에요. 2025년 기준으로 노션, 컨플루언스 같은 툴들은 멀티미디어를 내장하고 연구 자료를 연결하며 PRD를 대시보드와 직접 연결할 수 있도록 진화하고 있습니다.

기획서는 백로그, 프로토타입, 성과 지표와 실시간으로 연결되어 살아 숨 쉬는 협업 허브가 되어야 합니다.

문서를 위한 문서가 아니라, 팀을 위한 문서여야 한다는 거죠.

AI를 올바르게 활용하는 기획의 기술

그렇다면 AI는 어떻게 써야 할까요?

AI에게 결정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대신 고객 인터뷰 노트, 시장 조사 자료, 경쟁사 분석 내용을 AI에게 주면서 "이 내용으로 문제 정의 초안을 잡아줘" 또는 "놓칠 수 있는 예외 케이스를 뽑아줘"라고 요청하는 방식이 훨씬 효과적이에요.

GitHub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AI 코딩 도구로 시간을 절약한 개발자 중 40~47%가 그 시간을 시스템 설계와 기획에 더 많이 투자한다고 답했습니다. 개발자들조차 AI로 확보된 시간을 더 상위 문제에 투자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판단과 의도는 사람이 제공하고, 구조화와 초안 작성은 AI가 지원하는 협업. 이게 지금 시대에 가장 강력한 기획 방식입니다.

기획자의 역할이 바뀌고 있다 — 작성자에서 조율자로

AI가 초안 작성을 담당하는 세상에서, 기획자의 가치는 '잘 쓴 문서'가 아니라 '올바른 방향으로 팀을 이끄는 판단'에서 나옵니다.

실제로 제품 임원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앞으로 기획자에게 가장 중요한 역량으로 '전략적 사고와 비즈니스 감각'을 꼽은 비율이 59%에 달했습니다. AI·머신러닝 기술 자체를 중요시한 비율은 22%에 그쳤고요.

문서를 빠르게 만드는 능력이 아니라, 무엇을 만들지 결정하는 판단력이 진짜 경쟁력입니다.

고객 피드백, 시장 신호, AI가 만들어낸 초안들을 하나의 일관된 '왜 지금 이 문제인가'로 엮어내는 것. 그게 지금 기획자에게 요구되는 핵심 역량이에요.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시대일수록,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이깁니다.

마무리

기획서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30페이지짜리 설명서에서 사용자 스토리 백로그로, 실시간 협업 허브로, 이제 AI와 함께 진화하는 전략 문서로 계속 변해왔어요. 하지만 그 본질은 항상 같았습니다. 팀이 무엇을, 왜 만드는지 정렬하는 것.

AI가 초안을 순식간에 만들어주는 지금, 오히려 '무엇을 만들지 않을지'를 판단하는 기획자의 역량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습니다. 명확한 방향, 고객 근거, 비즈니스 가치. 이 세 가지를 갖춘 기획서는 팀을 정렬하고, 고객에게 진짜 필요한 것을 만들게 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기획서에 '왜'가 담겨 있는지 한번 확인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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