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만 잘하면 된다"는 공식, 언제까지 통할까요?
세일즈포스는 영업 자동화 하나로 시작했습니다. 슬랙은 기업 채팅만, 드롭박스는 파일 공유 하나로 수십억 달러 기업이 됐죠. 이게 바로 지난 20년간 SaaS 시대를 지배한 '포인트 솔루션' 전략이었어요.
그런데 요즘 이 공식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벤처캐피탈 운용사 Theory Ventures의 파트너 토마스 퉁구즈가 최근 발표한 분석이 꽤 인상적인데요. 핵심 메시지가 딱 한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SaaS 플레이북은 전문화에 보상을 줬다. AI 플레이북은 범위(breadth)에 보상을 준다."
이 한 문장이 지금 실리콘밸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패러다임 전환을 정확하게 짚어낸다고 저는 생각해요. 오늘은 이 변화가 왜 생겼는지, 어떤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지 이야기해볼게요.
SaaS 시대의 '쪼개기' 전략, 왜 20년이나 통했을까요?
2000년대부터 시작된 SaaS 혁명의 공식은 명확했어요. 바로 '언번들링(Unbundling)', 즉 쪼개기였습니다.
원래 하나의 거대한 패키지 소프트웨어 안에 묶여있던 기능들을 분리해서 독립 제품으로 만들었어요. HR은 워크데이, 회계는 퀵북스, 프로젝트 관리는 아사나, 영업은 세일즈포스, 마케팅 자동화는 허브스팟. 이렇게 각 영역에서 최고의 도구를 골라 조합하는 '베스트 오브 브리드(Best-of-Breed)' 스택이 탄생했습니다.
이 방식이 통한 이유는 간단해요. IT 담당자들이 도구들을 연결하는 통합 작업을 감당할 수 있었고, 도구들이 충분히 안정적으로 오래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조직이 충분히 익힐 시간이 있었던 거죠.
그런데 AI가 이 모든 계산을 바꿔버렸어요.
42일마다 바뀌는 세상, 기업들은 지쳤습니다
AI 모델의 변화 속도가 핵심 문제예요. AI 주요 모델은 평균 42일마다 새 버전이 출시되고 있다고 합니다. 42일이에요.
기업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무서운 숫자입니다. 새로운 AI 도구 A를 도입하고, B와 연동하고, C와 통합하는 스택을 구성해놨는데, 6주 뒤에 모델이 바뀌고 지형이 달라진다면? 그 통합 작업 전부가 반쯤 낡은 것이 돼버리는 거죠.
구매자들은 3~5년을 믿고 갈 수 있는 플랫폼을 원합니다. 매 분기마다 "이 도구가 아직도 최선인가?"를 점검하는 인지적 부담을 더 이상 감당하지 않으려는 거예요.
이것을 '언번들링의 인지적 부담(cognitive burden of unbundling)'이라고 표현하는데, 도구를 조합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너무 피곤한 일이 된 겁니다. 실제로 가트너에 따르면 2030년까지 기업 SaaS 지출의 40% 이상이 사용량 기반 또는 성과 기반 과금으로 이동할 것으로 전망되는데, 이 자체가 기업들이 도구 하나하나를 따지기보다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를 원한다는 신호예요.
이미 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 사례로 확인해볼게요
이론이 아닙니다. 이미 눈에 보이는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어요.
Harvey는 처음에 법률 AI로 시작했습니다. 계약서 검토, 법률 문서 분석에 특화된 도구였어요. 지금은 어떨까요? 기업 법무팀, 법원 시스템, 회계법인까지 확장해서 PwC와 공동으로 25개 이상의 세무 영역을 커버하는 세무 AI 모델까지 만들었습니다. '법률 AI'에서 '전문 서비스 AI 플랫폼'으로 포지셔닝 자체가 바뀐 거예요.
Glean은 기업 내 문서를 검색해주는 도구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헬스케어·금융·정부 기관을 위한 버티컬 솔루션을 팔고 영업·인사·개발팀 전용 AI 에이전트를 제공하는 'Work AI 플랫폼'이 됐습니다.
ElevenLabs는 텍스트를 음성으로 바꿔주는 단일 기능 도구였어요. 지금은 고객 서비스용 음성 에이전트, 음악 생성, AI 오디오북까지 하는 회사가 됐습니다.
패턴이 보이시죠? 모두 '포인트 솔루션'으로 시작해서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어요. 이게 우연이 아닌 겁니다.
파운데이션 모델 기업들까지 버티컬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더 주목할 만한 움직임은 OpenAI, Anthropic 같은 파운데이션 모델 기업들의 행보예요.
이들은 원래 API를 팔아야 하는 기업들이잖아요. 개발자에게 모델을 제공하고, 기업들이 그걸로 자기 서비스를 만드는 방식이었죠. 그런데 지금 OpenAI는 헬스케어·생명과학 버티컬을 만들고 산업 특화 영업팀을 꾸렸고, Anthropic은 헬스케어·보험·정부 시장을 담당하는 산업 조직(Industries)을 직접 구성했습니다.
API를 파는 게 아니라 플랫폼이 되겠다는 선언인 거예요. 포브스코리아의 분석처럼 2026년은 외부 생태계와의 협력이 본격화하는 단계인데, 가장 강력한 모델을 가진 기업이 직접 버티컬 시장에 뛰어든다면 기존의 버티컬 AI 스타트업들 입장에서는 꽤 위협적인 상황이 되는 거죠.
이게 지금 업계의 가장 뜨거운 긴장 지점입니다.
SaaS 주가가 무너지고 있는 이유도 이 맥락입니다
2025년 S&P 500 지수가 17.6% 상승하는 강세장 속에서도 SaaS 인덱스는 6.5% 하락하며 시장 수익률을 20%포인트 이상 하회했어요. Salesforce, Adobe, ServiceNow 같은 업계 아이콘들이 고점 대비 25~50% 폭락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이게 단순한 기술적 조정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봐요. 시장이 "포인트 솔루션 SaaS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신호를 먼저 읽고 있는 겁니다. AI 시대에는 '직원당 ARR(연간 반복 매출)'이 생산성과 AI 도입 성숙도의 핵심 지표로 부상하는데, AI 네이티브 기업들이 직원당 50만~100만 달러 이상의 ARR을 내는 반면 전통 SaaS는 여기서 심각하게 뒤처지고 있거든요.
"기능을 판다"에서 "신뢰를 판다"로, 이게 핵심입니다
이 트렌드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기능을 파는 것이 아니라 신뢰를 판다"는 거예요.
AI를 도입하는 기업들이 진짜 두려워하는 건 기술이 아닙니다. "이 파트너가 1년 후에도 존재할까? 3년 후에도 내 업무 방식을 이해하고 지원해줄까?" 하는 불확실성이에요.
넓은 영역을 커버하는 통합 AI 플랫폼은 이 두려움에 정확하게 답합니다. 한 번 도입하면 시스템이 회사의 업무 방식을 학습하고, 그 위에 더 많은 기능을 쌓아나갈 수 있으니까요. 이것이 AI 번들링의 핵심 논리입니다.
세콰이어캐피털의 파트너 제스 리도 SaaStr 2025에서 비슷한 말을 했어요. "AI는 한편으로는 여러 기능을 하나로 통합하는 슈퍼 앱 트렌드를 가속화하면서도, 동시에 초특화된 니치 솔루션의 가치를 높이는 상반된 현상을 만들고 있다"고요. 결국 시장은 거대 플랫폼과 초특화 솔루션으로 양극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입니다.
한국 스타트업과 B2B SaaS 기업이 지금 해야 할 생각
이 트렌드는 한국 시장에도 중요한 함의를 줍니다.
한국과 미국의 SaaS 시장 규모는 약 40배 이상 차이가 납니다. 이 격차를 좁히는 방법 중 하나가 AI 기반 플랫폼 전략이에요. 여러 도구를 통합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고객 락인(lock-in)과 성장 모두에서 유리하거든요.
포인트 솔루션으로 시작한 B2B SaaS라면 지금이 확장 전략을 다시 점검할 때입니다. "우리가 보유한 데이터와 워크플로를 기반으로 어떤 인접 영역까지 확장할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로드맵에 그려야 해요.
기업 IT 구매자 입장에서도 도구를 선택할 때 "이 벤더가 3년 뒤에도 함께할 수 있는 파트너인가?"를 기준으로 삼는 것이 현명합니다. 기능이 좋은 도구보다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플랫폼을 선택하는 시대가 된 거예요.
마무리
SaaS 시대의 핵심 전략은 '쪼개기(언번들링)'였지만, AI 시대의 핵심 전략은 '묶기(리번들링)'입니다. 42일마다 AI 모델이 바뀌는 세상에서 기업들은 기능이 아닌 신뢰를 삽니다. Harvey, Glean, ElevenLabs 같은 기업들이 포인트 솔루션에서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고, OpenAI와 Anthropic까지 버티컬 시장에 직접 뛰어들었습니다. AI 시대의 승자는 전문화가 아닌 범위(breadth)를 가진 자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 당신이 쓰고 있는 소프트웨어가 3년 후에도 믿을 수 있는 파트너인지, 한 번쯤 점검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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